1,341회 *동천역- 고기리- 백운산 산행 화보 (1) /10:00 동천역- 10:40 고기리- 10:50 수양관-11:20 쉼터
538-615
사진 민대홍 총무님
사진 민대홍 총무님
고기리행 14-1, 14-2 번 마을버스는 수지 농협까지 걷지 않고 신분당선 동천역 1번 출구에서 탈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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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 10:10
561 10:20 목양교회
고기리 복지회관이자 수양관 고기 동산교회 앞 정류장에서 내립니다. 갈보리 기도원이군요.
570 10:40 백운산에 오르면서도 백운마을을 외면하기 쉬어요. 이 마을에서도 백운산 정상에 오르는 길이 있을 것같아요.
여기는 이종무 장군 집안 장수 이씨의 제각이고, 장군의 묘소는 능선 따라 올라가 산위에 있다. 이 부근의 거리가 대마도 정벌의 공로를 잊지 않기 위해 이종무로로 이름 지어졌다. 해군에서는 이종무함이 있다.
이종무
동의어 양후(良厚) 다른 표기 언어 李從茂
1360(공민왕 9)∼1425(세종 7). 조선 전기의 무신.
개설
본관은 장수(長水).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고, 1381년(우왕 7)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97년(태조 6) 옹진만호로 재직중 왜구가 침입해 성을 포위하자 끝까지 싸워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첨절제사에 올랐다. 1400년(정종 2) 상장군으로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간(芳幹)의 군사를 무찔러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녹훈되고 통원군(通原君)에 봉해졌다. 의주의 병마절제사를 거쳐, 1406년(태종 6) 좌군총제(左軍摠制)가 되고 이어 우군총제를 겸했으며, 이 해장천군(長川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1408년 남양·수원 등의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중군도총제 등을 역임하고, 이듬 해 안주도병마사, 1411년 안주절제사를 거쳐, 이듬 해 별시위좌이번절제사(別侍衛左二番節制使)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3년 동북면도안무사 겸 병마절도사를 거쳐, 영길도도안무사(永吉道都安撫使)가 되었다. 1417년 좌참찬·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의용위절제사(義勇衛節制使)를 지내고, 1419년(세종 1) 삼군도체찰사에 올랐다.
이 해 왜선 50여 척이 비인현의 도두음곶(都豆音串)에 침입해 병선을 불태우고 약탈하며, 절제사 이사검(李思儉)을 해주·연평곶(延平串)에서 포위하는 등 침입이 잦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적의 허점을 틈타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그에게 전함 227척, 군량 65일분, 군졸 1만7285명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이에 정벌군을 지휘해 대마도를 공략, 대소 선박 129척과 가호(家戶) 1,940여 호를 소각했으며, 적 114급(級)을 참수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귀국한 뒤 찬성사에 승진했으나, 불충한 김훈(金訓)·노이(盧異) 등을 정벌군에 편입시켰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어 상원(祥原)에 유배되었다. 이듬 해 복관되고, 1421년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다음 해 사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행한 정희원(鄭希遠)의 불경한 행동을 직계하지 않아 1423년 과천에 부처(付處)되었다가 이듬 해 풀려나와 복관되었다. 시호는 양후(襄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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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