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삼남,영남,관동길

35. 경북 영남길을 7인방이 걸어내려가다 : 다부동 18 / 2015. 9. 9 (수) 06:00 구미산단- 07:35 다부동- 08:25 소야고개로

august lee 2015. 9. 4. 05:23


가35

구국용사 충혼비 앞에서 2015. 9. 9(수)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모였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전주콩나물국밥을 먹고, 택시 두 대에 나누어 타고 당일 출발지점인 칠곡 가산면사무소까지 갑니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숙소인 공단 4단지 옥룡에서 장천면사무소까지 7키로, 장천면사무소에서 가산면사무소까지 8키로 등 15키로이고, 요금은 13,000원 정도로 나왔어요. 앞선 택시가 가산인터체인지에서 면사무소를 찾았는데, 뒷차가 오더니 네비를 작동시켰는지 묻더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며 앞장 섰습니다. 그런데 동네가 나오는데도 계속 달리더니 다부동 전적비가 보이는 곳에서 차를 세웠어요.


나중에 들으니 소설보다 더 기막힌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박찬도 고문님이 어제 저녁 구미 국가산업단지 제4단까지 왔으니, 이 부근에 사는 조카따님에게 전화하여 통화를 시도했지만 실패하셨데요. 우연히 새벽에 지나가던 개인택시를 잡아탔는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 조카사위가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가산면사무소까지 간다고 하니, 조카사위님 말씀이 나이 드신 어르신들께서 다부동 고개를 걸어오르시는 것은 무리라고 강조하셨데요. 그래서 고갯길 5키로를 더 달린 것입니다. 


구미시에서 대구 칠곡으로 넘어오면 시외임금이 적용되어 가산금이 더 붙은 답니다. 07:35 다부동에 도착했어요. 우리가 탄 택시비는 23,000원이 나왔어요. 박찬도 님이 탄 택시는 메타를 꺾지 않았다며 한 푼도 받지 않고, 처삼촌님을 잘 모시는 일이 일어났어요. 조카 사위님, 감사합니다. 예정된 가산면사무소로부터 5키로를 차량으로 이동하여 약 1시간 20분쯤 더 여유가 생겼습니다. 둘째날 일정이 자연스럽게 조정되면서, 대구 3호선 지상철을 타고 시내 구경을 잘 하고, 서문시장도 둘러보며 점심도 먹고, 동대구역에 가서 여유있게 청도행 기차를 탈 수 있었구요. 만사가 OK였어요. 박찬도 님, 감사합니다.

 

다부동 전적지는 잘 보존하고 있었어요. 아마도 50분 이상 둘러보고 기념사진도 여러 장 찍었습니다. 이중근 님이 지은 책도 얻었어요. 관리자에게서 소보 고개를 넘어 칠곡으로 가는 길을 잘 알려주셨습니다. 다부동 전투 65주년이 되었어요. 어리가 국민학교 3학년때(나이로는 10세) 6 25 한국전쟁이 일어났으니, 다부동 전투에 대하여 잘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전쟁의 산 교육장에서 찍어온 사진 자료를 중심으로 안내하겠으며, 참고가 된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부동은 6 25 참극으로 조국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섰을 때, 한미 연합군이 피로써 막아낸 혈전의 전쟁터입니다. 1950. 8월 대구에 침투하기 위해 북한군 5개 사단이 공세를 가해 올 때, 국군 1, 8사단이 주축이 되어 미 제1기병사단과 함께 밀고 밀리기를 수 십 차례 계속하였어요. 수많은 희생자들의 고귀한 생명을 바쳐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9월 초에도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려고 최후의 공세를 폈으나, 우리 국군과 경찰은 끝까지 분투하여 대구- 다부동 전선을 고수하였어요.


적 사상자 17,500명이지만 아군도 10,000 여 명 의 인적 손실을 입었습니다. 경찰은 15,000명이 참전하여 기록된 전사자만 197명으로, '대구 사수 정신'은 6 25 전쟁사에 길이 빛나고 있어요. 국방부에서 1981년 11월 30일, 전쟁의 산 교육장으로  이 자리에 다부동 전적 기념관을 건립히였습니다. 다부원多富院은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로 역驛이 있던 곳입니다. 정근화 님은 군에 있을 때 호크 미사일을 들여와 교육을 받으셨데요. 호크마사일 앞에서 사진을 찍어드렸습니다. 우리 영남길 7인방은 구국용사 충혼비 앞에서 묵념을 하고 기념사진을 찍었어요. 어리도 생각해 보니, ROTC 제2기생으로 전방 소대장 근무를 하고 전역한 지 50년이 지나는군요.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이시여! 국립 현충원에 그 뼈와 넋이 묻혀있지만, 여기 다부동에 와 보니 그 분들의 희생이 더욱 실감 납니다.


대형 프랙카드에 9개 부문으로 나누어 다부동 전투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1. 대한민국을 구한 다부동 55일

2. 삶과 죽음의 경계, 왜관 철교

3. 혈맹국의 희생, 자고산 전투

4. 가장 치열했던 328 고지 전투

5. 전무 후무한 융단 폭격

6. 시신 혈하의 유학산 전투

7. 전차전, 블링엘리 전투

8. 보이지 않은 숭고한 희생

9. 다부동 전투의 의의 등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융단 폭격은 1950년 8월 16일, 단 26분 동안에(11:58-12:24), B-29 전투 폭격기 98대가 동원되어 5.6Km * 12Km = 67.2 Km 평방에 960톤의 폭탄을 퍼부은 폭격으로, 그야말로 그 안에 모든 것을 초토화시킵니다. 전무후무全無後無란 인류 역사에 처음이자 마지막 있는 일이라는 뜻이 아닙니까? 북한군의 침략이 얄밉지만, 전무후무한 융단폭격은 적과 아군의 구분없이 희생되는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만일 다부동 전투에서 우리가 패전했더라면,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60 여년전 한반도는 공산치하에 속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더욱 끔찍합니다.


프랙카드의 맨 마지막 아홉번째 다부동 전투의 의의에 대하여

1. 다부동 사수 - 오늘의 대한민국 존재

2. 낙동강 방어선 사수로 인천상륙작전 성공 계기

3. 최초의 한미 연합작전으로 반격의 발판 마련이라고 쓰여있습니다.


영남길 둘째 날, 오전 7시30분부터 8시20분까지 50분간 다부동 전적비 참배는 많은 것을 배우고 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여, 35. 경북 영남길을 7인방이 걸어내려가다 : 다부동 18을 하나의 장으로 구성하였어요.

이중근 님이 만드신 '6 25 전쟁 1129일 요약본은 더 많은 자료를 싣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458-540


466   9월 9일 수 06:03












477  07:25








487  07:42









497  07:48









507   07:51









517   07:56









527   08:01






백선엽 장군 호국 구민비 




537   08:12







547   08:25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