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삼남,영남,관동길

53.경남 영남길을 7인방이 걸어내려가다 : 작원잔도 36 /2015. 10.14(수) 07:59 쌍교-작원잔도08:49 -밀양2경계 08:49

august lee 2015. 9. 29.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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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진생태문화공원 안내판에 경부선 철도와 자전거도로 맟 낙동강이 나와 있어요. 작원관 지는 그 터전만 남아 있다고 하여 그냥 통과했는데, 밀양시에서 고갯길에 작원관을 복원해 놓았습니다. 아무래도 기회가 생기면 물금에서 삼랑진까지는 고갯길로, 삼랑진에서 밀양까지는 국토종주 자전거길로 북상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고갯길에서는 전망을, 자전거길에서는 편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간이 포구에 보트가 정박해 있고 낚시질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양산까지 1.5K라는 밀양 No 3 안내판이 있는데, 이것도 밀양 삼랑진읍과 양산시 물금읍 사이의 경계선까지를 말합니다. 주변 관광지 만어서와 삼랑진 양수발전소, 작원관과 삼랑진 딸기 한마당 축제 등 안내도가 나와 있어요. 잔도棧道란 험한 벼랑에 암반을 굴착하거나 석축을 쌓아서 낸 도로이며 대동여지도에서는 작천이라고 불렀고, 영남길에서 황산잔도와 작천잔도와 문경 토끼벼루가 대표적인 벼랑길입니다. 황산잔도는 물금읍 황산역에서 원동역까지, 작천잔도는 양산 원동 하주박에서 밀양 삼랑진(까치원, 깐촌)에 이르는 길을 말하죠.


작원관 鵲院關 최초의 옛터가 나옵니다. 원래는 낙동강 가에 있었는데, 경부선 철로가 개설되면서 없어진 것을 천태산 고갯길 좀 넓은 터에 밀양시에서 새로 복원하여 공운루拱運樓와 한남문 悍南門을 세웠어요. 임란 당시에 순국하신 호국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위령비도 세웠습니다. 아무래도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고갯길로 북상해야 할 것 같아요.  열린누리님의 블로그에서 본 주변 산책[5] 작원관(鵲院關)에서 일부를 옮겨 수록합니다.


1592년 임진(壬辰) 4 17일 아침에 동래(東萊)를 출발하여 양산(梁山)을 거쳐 침입(侵入)해 온 코니시[소서행장(小西行長)]의 왜병(倭兵) 1 1 8 7백 명의 병력이 부장(副將) 마츠우라[송포진신(松浦鎭信)]의 지휘로 오후 들어 산의 위쪽 방향에서부터 내려다보고 조총(鳥銃)으로 사격(射擊)을 가하며 달려들자 이곳을 방어(防禦)하던 밀양부사(密陽府使) 박진(朴晉)을 비롯한 군관(軍官) 이대수(李大樹), 김효우(金孝友) 등이 관병(官兵), 민병(民兵)과 함께 분전(奮戰)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하여 이대수(李大樹), 김효우(金孝友) 이하 300여 명이 목숨을 잃은 아픈 역사의 고전장(古戰場)이기도 하다.


철길 위로 석축만으로 높게 쌓아올린 인공 바위산이 나타나서 깜짝 놀랐어요. 영남길에 경부선 철로를 놓을 때 거의 90도에 가까운 수직 절벽을 쌓은 모습은 장관입니다. 당시 일본의 토목 기술과 장인정신을 느낄 수 있게 했어요. 중간에 인공 굴이 두 개나 보이는데 무슨 용도인지 궁금했습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잔도棧道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 나타났어요. 맨 밑 암벽에는 동기둥을 세울 수 있게 바위를 파내고, 거기에 돌기둥을 세웠습니다. 동기둥과 돌기둥 사이에는 기다란 바위를 마치 대들보처럼 이어놓고, 거기서부터 바위나 크고 작은 돌로 석축을 쌓아 놓았어요. 맨 위에는 같은 크기의 바윗돌을 가지런히 놓고 흙을 입혔는데, 경계석이 없어서 자칫하면 낭떨어지로 곤두박질할 수 있겠습니다. 위험한 구간이지요. 양산 No 36 부산시까지 20K지점에서 쉬었다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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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운루 拱雲樓와 한남문


작원관 임란 수절용사 위령비 비문


鵲院關壬亂殉節勇士慰靈碑 (작원관 임란 순절용사 위령비)

평화로운 사월, 느닷없는 도이(島夷)의 침략 소식에 부사(府使)의 소집령이 급박(急迫)하였으니, 놀란 가슴 진정할 길도 없이 보던 책과 쟁기를팽개치고 작원관(鵲院關)으로 내달렸다. 이미 왜장 코니시[소서행장(小西行長)]의 잔폭(殘暴)한 이만(二萬) 병력 앞에 부산, 동래가 떨어지고, 기장, 양산이무너졌으니 이제 작원관은 향토의 보루(堡壘), 국맥(國脈)의 요처(要處)가 되었다. ! 부사(府使) 박진(朴晉) ()은 비록 장략(將略)이 있었으나 어찌 삼백(三百)의 병사로 수많은 왜병을 막을 수 있겠는가? 울긋불긋한기치(旗幟)와 피 묻은 창칼을 높이 든 채 몰려오는 저 흉악한 왜구(倭寇)들을 바라보며 가슴을 저미는 절망감에몸을 떨고, 작별도 제대로 못한 부모처자 생각에 속으로 울었도다. 돌아보면공소(空疎)한 말다툼으로 세월을 허송하며 국방을 돌보지 않은 고관대작(高官大爵), 홍유석덕(鴻儒碩德)들이 그토록 원망스러운 적도 없었다. 낙동강이 굽이치는 험난(險難)한 지형(地形)을 의지하여 버티기 수일 만에 양산으로 우회한 적병들의 공격에 관()은 무너지고, 콩 볶는 듯한 조총(鳥銃) 탄환에 동료들이 쓰러졌다.


분노(憤怒)로 치를 떨며 칼 휘둘러 적을 치니, 고함은 천지를 울리고 핏물은 허공에 뿌려졌다. 그러나 어찌하랴! 군세(軍勢)는 미약(微弱)하고 용력(勇力)이 다하여 마침내 왜적의 칼날 아래목숨을 잃으니 그 안타깝고 억울함을 어찌 말로 다할 것인가? 수백 년 이름없는 원혼이 되어 비바람 치는날이면 꿈인 듯 생시인 듯 찾아와 울었으나 그리운 사람들은 어디에도 없었으니 효제충신(孝悌忠信)이 덧없는 것이던가. ! 충절(忠節)과 효우(孝友)의 고을에서 나라를 보전코자 목숨과 이름을 돌아보지 않은 영령(英靈)들의 순충(純忠)을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 그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치열한 자취는 후인(後人)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고청사(靑史)에 길이 기록되어 있는도다.


사백여 년이 지난 오늘 향토의 후예(後裔)들이 선인(先人)들의 충국헌신(忠國獻身)을 영원토록 기리고자 전적지를 정비하고, 정성을 다하여 향화(香火)를 잇고자하니 이제 영령들은 깊은한()을 풀고 영원히 안식(安息)할 지어다.


()하노니

한 번 죽음으로 쓰러지는 나라를 떠받치니

그 의기(義氣) 천하에 높아 장부(丈夫)의 가슴을 떨어 울렸다.

언제 공명(功名)을 생각했던가! 마음 속엔 가국(家國)의 안위(安危) 뿐이네.

후인(後人)들이 그 정신 높이 받드니 지나는이 반드시 옷깃을 여밀지라.


鄕後生(향후생) 韓國精神文化硏究院(한국정신문화연구원)

韓國學大學院(한국학대학원) 敎授(교수) 朴丙鍊(박병련) 謹撰(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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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